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82] 사랑과 실연은 동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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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나약하지 않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1 06:30:10

“사랑하는 것과 실연은 같은 거군요. 마음속에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거니까.”

정하운이 읽는 것을 멈추었을 때 내가 말했다.

“실연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건, 그 사람과 상실감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선 뒤 노트를 내게 건네 주며 말했다.

“하지만 에바는 이토록 그리워했으면서도 약해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강해졌죠.”

나는 노트를 받아 무릎에 내려놓으며 유리창 앞에 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바를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내가 묻자 정하운이 뒤돌아섰다.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계속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그녀가 내 방을 찾아온 이유를 추측했으면서도 내 상황에만 빠져 얼마나 바보처럼 그 의도를 놓쳐 버렸는지 깨달았다. 달빛도 없는 바다는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로 밀려왔다 밀려갔다. 파도 소리로만 높이 일어섰다가 파도 소리로 또다시 하얗게 곤두박질쳤다.

“에바,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거죠? 살아 있는 거였어요!”

심장이 몸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어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치듯 나는 큰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내 무릎에 있던 에바의 노트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밖에서 쿵,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하운과 나는 놀라 방을 뛰어나갔다.

“아앗. 박사님!”

정하운이 비명을 질렀다. 최주결이 가슴을 쥐고 복도에 쓰러져 짧게 경련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최 박사를 살폈다. 코의 숨결을 느끼고 심장에 귀를 대 보았다. 심장이 멎은 듯했고 호흡은 불규칙했다.

“119에 연락해요. 어서.”

정하운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녀가 거실에서 구급대에 전화하는 동안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양쪽 손가락을 깍지 끼고 일정한 간격으로 박사의 가슴을 압박했다.

“하나, 둘, 셋. 넷.”

하루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지하철을 운전하는 기관사들은 응급 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심폐소생술과 역마다 설치되어 있는 자동 제세동기 사용법을 배운다. 위급한 상황에서 의료진이 달려올 때까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서둘러선 안 된다고, 생명을 믿어야 한다고, 나는 교육 시간에 배운 것을 반복해서 상기하며 최 박사가 죽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커억!”

기침을 하듯 그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 보고 눈동자를 살폈다. 최 박사가 가늘게 눈을 뜨고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혈색이 돌아오고 호흡도 일정하게 회복되고 있었다.

“폭설이라 시간이 걸릴 거래요. 어쩌면 좋아요.”

2층으로 다시 올라온 정하운이 말했다.

최주결이 깨어난 것을 보고 곁에 앉아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최주결은 괜찮다는 뜻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잘해 주었네.”

최주결이 잠시 후 눈을 뜨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힘없이 손을 저으며 정하운에게 119는 취소하라고 했다. 대신 그는 식탁 위에 있던 바구니를 가지고 올라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도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심장전문의일세.”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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