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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은 중국인들에게 일제(日帝)를 제압한 전승절의 달이다. 중국에선 ‘항일’ ‘항전(항일전쟁)’이 있을 뿐 ‘반일’이란 단어는 거의 안 쓴다. 반일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시위 때 본격 등장한 한국산 한자어다. 고위층 다수가 일제 장교 출신인 박정희정부로선 ‘경제개발을 위한 친일’이라고 국민을 달랠 때 반일 정도는 허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 국민통합의 매개로 활용한 측면도 있다. 반일 경쟁심리가 한국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했으며 산업화 시대의 고단함과 사회적 모순을 어느 정도 무마시켜 줬다.
‘항전’ 자체는 중국사에서 명실상부한 개념이지만 항전의 주역이 국민당이었기에 팩트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개혁개방 이전에 항일은 과거사에 불과했다. 아니, 그걸 강조하면 국민당이 부각되기에 일부러 외면했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중국인들도 이젠 반일에 열심이며 ‘윤일’(潤日·룬르)도 유행이니 격세지감이다. 윤일은 중국어 발음기호를 영어 run에 빗대 ‘일본으로 달아나다’를 뜻하는 신조어인데 ‘윤택할 윤’자를 써서 부자들의 탈출임을 암시했다. 중국발 이민 급증으로 위기의식에 휩싸인 일본에선 사상 처음 외국인 문제를 의제로 내세운 신생 정당이 7월 참의원 선거 때 대약진을 했다.
중국 전승일은 일본이 도쿄만 미 군함(미주리호) 선상,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이튿날인 9월3일인 반면, 대만(중화민국)에겐 장제스가 당시 수도 난징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9월9일이다. 이것으로도 항전의 중심이 분명해진다. 중국에서 공산당 주도의 항일서사를 다룬 영화·드라마가 2010년대 들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산당 정통성 증명에 항일서사 독점은 필수적이며 전승절 중시 역시 시진핑 시대의 한 특징이다.
이번 전승절 5주 전에 나온 영화 ‘난징사진관’은 1937년 일제 만행을 입증할 사진을 지키고자 애쓴 사연을 그려 여름철 성수기 역대 최고 흥행 기록(현재 약 4430억 원)을 세웠다. 영화 ‘731’은 만주사변일(9월18일)에 맞춰 개봉이 연기됐다. 이런 가운데 반일 정서가 고조돼 재중(在中) 일본인들을 향한 혐오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개혁개방 이전엔 없던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관련국들을 통틀어 중·일전쟁의 피해액은 최대 규모였지만 1972년 중·일 수교 때 마오쩌둥(毛澤東)은 배상금을 사양해 일본을 감격시켰다. 하지만 여기엔 훗날 ‘마오의 아이러니’로 불리게 된 역사적 진실이 숨어 있다.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한 게 일제 침략 덕분이라며 감사를 표한 마오의 발언이 일본·미국 사절단 행사나 인터뷰 등에 매번 등장했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인민을 각성시켰다”는 공식 워딩을 드라마틱하게 돌려말한 게 아니라 표현 그대로다. 2019년 번역 출간된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엔도 호마레 저)는 리영희의 저작들과 ‘중국의 붉은 별’ 등을 통해 뿌리내린 마오 관련 통념과 환상을 여지없이 박살낸다. 책엔 국민당이 일본과의 전투로 힘을 빼게 해서 추후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자 공산당이 일본을 도운 스파이 행위가 기술돼 있다. 애당초 목표는 권력이었지 항전이 아니었다.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시안(西安)사건(1936년 12월) 또한 지나칠 수 없다. 서북지역에 시찰 차 온 장제스를 감금하고 공산당과 연대해 항일에 나설 것을 압박한 동북 군벌 장쉐량이 중국 공산화의 숨은 결정타였다. 일제의 만주국 수립으로 자기 근거지에서 쫓겨나 있던 그가 밀어붙인 국공합작이 지리멸렬 상태의 공산당을 기사회생시켰다. 울분에 찬 장제스는 대만으로 밀려날 때 장쉐량을 연행해 가택연금에 처했다. 그가 55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장제스 사후 15년이 지나서다. 서구물 먹은 당대 최고의 ‘모던 보이’ 장쉐량이 공산혁명 성공에 공헌했다는 것도 기막힌 아이러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의 총화인 9월 목전에 한국 신임 대통령의 첫 방일·방미가 새삼 역설적인 드라마를 더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대통령이 친일·친미와 한미동맹 강화를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나라 이른바 “극우 종미”는 이제 뭘 하나 싶을 지경이다. 다만 이재명표 실용외교에 강성 지지층이 얼마나 동의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민석 국무총리의 친형인 김민웅 촛불행동 대표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한미동맹을 “우리를 전쟁터로 끌고 갈 족쇄”에,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양키 제국주의의 끝판”으로 비유하며 “반드시 이 땅에서 몰아내자”고 다짐했다.
중국 관영 매체가 “전략적 자주성”을 촉구한 한국 대통령의 행보에 중국 네티즌은 조롱과 비난 댓글을 쏟아냈다. 물론 북한이 “더러운 족속”이라고 논평한 것보다 훨씬 더한 명장면은 교회와 미군기지 압수수색 관련 질문에 트럼프가 “정신병자 잭 스미스를 데려간 거냐”며 통역 도중 끼어든 순간이었다. 2021년 1월6일 사태 관련해 내란선동죄를 물어 트럼프를 기소하고 백악관 문서유출 혐의로 연방수사국 요원 30명을 동원해 자택 마러라고를 샅샅이 헤집은 인물을 한국 검찰에 비유하다니! 좌중이 빵 터졌으나 한국 측 참석자들은 문맥 파악을 못 해 어리둥절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심지어 트럼프는 “농담한 겁니다”라고 해 놓고는 굳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닐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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